도박중독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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갬아넌 5년잔치 소감문

김여사의삶 2023. 1. 19. 13:20

지난주 금요일. 아들의 초등학교 예비 소집일이었다.

아들은 전날 저녁부터 설렜는지 내일은 초등학교에 들어가 볼 수 있는 날이라며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 설렘이 가득한 아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이가 다닐 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통에 겨울 동안 세 번 정도 차를 몰아 주차장에 정차를 했었지만, 단 한 번도 차 문을 열고 내려보지를 않던 아들은 예비소집일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하게 운동장에 첫 발을 내디뎠다.

아직 날씨는 추웠지만, 내리쬐는 햇살은 따스했다.

어서 오라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했노라고.

다시 새로운 시작이 여기 있노라고 그렇게 반기는것만 같았다.

중앙 현관으로 들어서니 마중 나오신 선생님들이 아들과 나를 반겨주셨다.

아이가 학교를 둘러 보고 싶다고 했다.선생님께 허락을 받고는 1층부터 4층까지- 1학년 교실부터 급식실과 도서관 컵퓨터실 과학실 등 특활실을 모두 살펴보고 나서야 차에 오른다.

호기심 많고 똑 부러진 아들을 보며 언제 이렇게 자랐는가 싶어 마음이 울컥했다.

 

2017년 12월 30일. 22개월이던 아들을 데리고 GA 문을 두드렸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 말고는 할 수 있는 말들이 없어서 늘 돌고래 같은 소리만 지르며 회합장과 연수와 신년회 발표장을 누비며 뛰어다녔었다.

아이가 이제 몇 개월이 되었는지 세아려보니 83개월.

아들은 GA에서 61개월째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5년이라는 시간이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 못 하던 아이가 자라서 학교를 가게 되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을 나는 곁에서 지켜 보았다.

시간의 힘은 대단했다.

도박중독자의 매서운 눈으로 아침까지 도박을 하던 정 선생을 모임에 끌고 나온 지도 5년이 되었다.

바뀌지 않을것 같았던 정 선생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바뀌었다.

5년이라는 시간동안 회복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정선생을 지켜보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겪는 것은 비슷한 것들을 겪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갬아넌에서 지나온 5년을 살펴보니 나도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는 얼굴이 웃는 얼굴이 되었으니 말이다.

갬아넌 안에서 5년간의 나를 돌아보니 나는 크게 네 가지 결단을 내렸던 것 같다.

첫 번째 결단은 모임에 가급적 최선을 다해 참석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처음 GA 모임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죽지 못해 나왔지만 그래도 자꾸만 거부감이 들었었다.

가족병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변화를 주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모임의 선행자들이 도박중독을 멈추려면 다녀야 한다고 자꾸 끌고 밀었다.

일하느라 못 가겠다 했더니 "김 여사님 하루 일해서 얼마 법니까?" "정 선생 도박하면 하루에 얼마 날렸습니까?" 하신다.

말문이 막혔다. '그래 일이 먼저 가 아니지, 단 도박이 먼저지..'

그렇게 모임에 첫발을 내디딘 일주일 뒤에 있었던 신년회에 참석을 했다. 가서 수 백 명의 중독자들과 가족들을 만났고, 우리 아이들 또래를 데리고 오는 부부들이 있다는 것에 큰 위안을 얻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었구나.'

그렇게 그 사람들을 만나러 타모임, 본 모임.. 연수, 신년회, 야유회..그렇게 한 번 두 번, 다니기 시작했다. 단 도박이 되니 도박중독을 만들었던 성격적 결함과 원인들로 인한 또 다른 문제들이 불거져 나와 우리 가족은 다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사실 이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지만 점차 좋아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100일 잔치도, 1년 잔치도, 2년 잔치도 어떻게 했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이 현실과 싸우면서 보냈었다.

회복하고 싶었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빚, 육아, 화, 충동 등을 다스리는 것에 급급했다. 그렇게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우리는 모임을 찾았다.

특히 진주에서 거제 모임이 분가되는 시점. 나는 다시 한번 더 '모임에 가급적 최선을 다해 참석하자' 하는 내 결단을 다졌다.

모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참석하자. 적어도 1주일에 2회 이상은 꼭 참석하자.

그렇게 내 체력이 허락되는 한 다니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1주일에 2~3회 모임 참석은 유지를 하고 있는중이다.

1주일에 1번 참석과 1주일이 2~3번씩 참석은 당장은 눈에 띄는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약 GA에 머문 61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주 1회만 참석했었다면 약 250회 정도의 회합에 참석했을 것이다.

두 번씩 참석했다면 500회, 3번씩 참석했다면 750회였을 것이다.

주 1회 참석과 주 3회 참석.

5년이라는 시간이 경과되어 그 횟수를 세아려보니 1회 참석 시에는 250회, 3회 참석했다면 750회가 된다.

즉 일주일 2번의 차이가 5년이면 약 500번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시간으로 따지면 1000시간. 오며 가며 차에서 왕복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2000시간은 족히 차이가 날 것이다.

회합 참석의 횟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단 한 번을 참석해도 진성성 있게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일주일에 1회 참석만 했었어도 과연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을까? 오늘의 정 선생이 만들어졌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나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모임을 참석하고, 오며 가며, 모임이 끝나고 만들어지는 수 천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성장하는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임에 다니다보니 처음에는 마라톤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 여정들이 마라톤이 아닌 꼭 수영을 배우는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체격이 다르고 힘도 다르고 모두 개인차이가 있겠지만 각자의 상황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수영을 배우는 것과, 2번 3번 가는것.. 어떤 쪽이 더 빠르게 배울 수 있을까는 답이 나와 있는 문제다.

요즘에는 수영관련 유튜브 영상도, 온라인 모임도, 책도 많다. 그런데 그렇게 앉아서 배운다고 내가 과연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직접 물 속에 뛰어 들어 목 끝까지 숨도 차보고, 물도 먹어보고, 귀에 물이 들어가서 멍.. 한 증상도 겪어보면서 내 몸이 직접 익히도록 해야 한다.

팔을 젓고 다리를 굴려 숨을 쉬는 연습을 꾸준하게 해야지만 내 몸이 수영을 익힐 수 있다.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것, 중독에서 벗어 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마음 근육을 키우는 것.. 불안을 잠재우는 것, 나를 다스리는 것.. 이 모든 것이 GA라는 수영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복하고 싶었다.

도박중독 이전의 삶, 도박 중독 이전의 병들지 않았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와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연수 소감 발표와 2년 잔치를 연이어 하며 '회복'이라는 단어를 내 삶 가장 꼭대기 위에 올려놓고 살기 시작했다.

나는 회복되는 삶을 살고 싶어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다. 두 번째 나의 결단은 내가 경제적으로 하던 일을 그만둔 것이었다.

갬아넌 책받침에 우리가 지킬 권장사항 여섯 번째에 이런 문장이 있다.

" 갬아넌에 나오는 사람은 가족 중의 중독성 도박자가 지고 있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하여 일을 하지 않도록 합시다."

정 선생의 월급은 빚 갚기도 빠듯했다. 생활비를 내가 벌어야 생활이 되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았다. 이건 도박 빚일까 아닐까? 내 생각은 도박빚이었다. 내가 생활비를 버는 것도 정 선생의 도박빚을 갚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꼬리표만 달랐지 핵심은 도박빚이었다.

정 선생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었고 여전히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의 급여는 늘 빚을 갚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생활비는 내가 담당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게끔,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서 한 창업이었지만 정 선생의 빚을 갚아내는 도구로 전락한 일을, 나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 생활비 만큼 다시 빚을 내어 쓰기 시작했다.

회생과 개인 빚을 상환하는 것만큼 다시 생활비로 금융권에 대출이 만들어져 갔다.

그러다가 회생이 끝나고서야 빚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활비로 빚을 내어 생활한지 3년이 되었다. 그래서 빚이 많지만 우리 가족이 먹고 쓴 것이라 아깝지도 않고, 억울하지도 않다.

나는 일을 그만두고 그 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를 돌보고 공부를 했다.

모임에도 더 자주 다녔고, 육아 상담을 받으러 다녔고, 종교도 가지게 되었다. 만약 내가 계속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지금만큼 나를 돌아보며, 가족을 돌아보며, 공부하는 겨를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나는 이제부터 일을 그만두고 빚을 내어 생활하겠다. 회복에 전념하겠다'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했을 때, 나 역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거 미친 짓이 아닐까? 혹시라도 또 사고를 치면 그때는 어떻게 수습하지? 갑작스럽게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목돈이 들 텐데?' 하는 경제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위대하신 힘을 찾았다. 혹시 이보다 더 큰 고난이 오더라도, 그것을 고난이 아닌 감사로 승화 시킬 수 있는 힘을 내게 주시리라 믿었다. 나는 불안이 올 때마다 기도를 하고 책을 찾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모임을 계속 찾아 다녔다.

그 믿음 덕에 큰 선물을 받았다. 사랑스런 둘째가 태어났고 그리고 행복감에 젖어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아이도 태어나고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빚이 줄어들지 않고 경제적으로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같은 돈이라도 도박빚이었는지 가족의 회복을 위한 투자였는지 지나고 나서 보니 나는 더 확신이 생긴다.

빚의 양은 같아도 그 빚의 결이 달랐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나아길거라 생각한다.

내가 GA에 발 담그고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한,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내가 한 ,두 번째 결단 덕분에 충분한 회복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회복을 넘어 성장이라는 단어를 내 인생 꼭대기에 세웠다.

나는 실패와 고난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도박중독 이전의 삶으로, 도박중독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 선생도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주길 바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도박중독 이전의 나의 삶이나 나의 상태도 정 선생의 상태도 사실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회적 잣대에 나를 욱여넣어 우선순위를 정하고, 타인과의 비교로 속앓이를 하고 가면을 쓰고 살았던 삶.

겉으로는 아닌척하면서 속으로는 아파트 평수와 타고 다니는 차를 키우기 급급하고, 직책과 연봉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던 과연 그 삶이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나였을까?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도박중독이 내 삶에 없었다면,

난 여전히 가장 볼품없고 멋대가리 없는 가면을 쓰고도 가장 쿨 한 척 멋있는척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나로 살지 않게 해준 정 선생의 도박중독이 참 고맙다.

세 번째 나의 결단은 갬아넌 봉사직에 몸담고,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자'를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봉사의 첫 시작은 선행자들의 이끎과, 정 선생 정신 차리게 하자는 나의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나를 회복시키고 바꾸는 것이 먼저 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타인을 바꾸려는 욕심으로 모임에 임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선행자들을 지켜보게 되었고, 따라 하게 되었고, 같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했고, 배가 불러 임신한 몸으로 다녀야 했다. 봉사자이면서도 봉사를 받게 되는 입장에 자주 처해졌었다.

여사님들과 선생님들께서 마음을 내어 주셔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 노력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잠시 주저하고 주춤해질 때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진짜 이게 최선인가?. 다시 한번 더, 너 진짜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렇게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 잡고 움직였다.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려는 나의 마음을 다 잡고 움직이니, 아내가 가니까 운전사로 따라나서면서 툴툴거리던 정 선생이

먼저 가자고 나서다가, 나보다 모임 참여 횟수가 훨씬 더 많아지고, 선생님들과의 소통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하지만 그 환경은 그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틀 안에 나를 넣어야 한다. 봉사직이라는 환경에 나를 넣었더니 정 선생이 들어섰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둘이 함께 모임 봉사자를 하고 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GA와 갬아넌을 지켜주고 계시는 협심자 선생님과 여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서 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던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있는 것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자'를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남을 살리면서 나도 살리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나의 결단은 위대하신 힘을 믿자는 것이었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믿을 것은 오직 나 자신,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나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니 13살, 초등학교 6학년 가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빠의 죽음이 만나진다.

아빠의 죽음 이후 다니던 종교시설에 발길을 끊었다. 기도문을 외우고 노래를 부르던 것을 그만두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길랭바레증후군으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계셨다.

아빠의 죽음, 치료 약이 없었던 엄마의 불치병. 부모의 부재 속에 나는 친척들의 손에 맡겨지며 동생을 돌보아야 했다. 내가 15살이 되어서야 엄마는 회복하셔서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신이 미웠다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내 삶이 수긍이 되었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의 나는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는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아이였고, 삭막한 세상을 살아 내야하는 K 장녀였다. 세상 믿을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10대 20대 30대를 보냈다.

사랑에 가득 차고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던 정 선생과의 결혼이 중독을 만나 ,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에는 목 놓아 부르짖으며 하늘에 대고 욕을 해댔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짓고 살았다고,

이제서야 나도 좀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나를 또...벼랑 끝에서 밀쳐내고 계신 거냐고, 모두 다 죽어야 이 고통을 끝나는 거냐고, 차라리 제발 나를 죽여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다 죽자고 덤벼들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정 선생을 원망하고,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했던 시기를 보냈다.

고통스러웠다. 괴로웠다.

숨 쉬는 것조차 하기가 싫었다.

제발 내일은 눈 뜨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를 재우다 울다 지쳐 눈을 감았고, 다시 오늘이 시작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꼬물거리는 생명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때는 죽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죽지 못해 살던 2017년 12월 30일. GA와 갬아넌을 알게 되었고 위대하신 힘에 대해 다시 듣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부정하면서 살았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마냥 미웠다.

그렇게 모임을 다니면서 미움이 덜어졌고, 내가 자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을 아무리 다녀도,' 위대하신 힘'을 교본과 하루하루에 살자를 통해 입으로 아무리 읽어가도,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GA에 다니기 시작한 지 2년 차가 되던 시점. 위대하신 힘을 믿어보자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종교에서 걸음마를 시작했다. 기도를 하면서 참 많은 눈물을 쏟아 냈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니 위대하신 힘이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냥 나의 감정에만 휩싸여 눈도 멀고 귀도 멀어 위대하신 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위대하신 힘은 묵묵하게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고통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희망의 씨앗들이었고, 축복의 시간들 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왔다. GA에 몸담고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닫쳤던 귀가 열리고 눈이 떠졌다.

비난과 원망이라는 가시 돋친 잡초가 자라 있었던 내 마음속을 하나 둘 손질하다 보니 내게도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위대하신 힘을 믿겠다고 결단하는 순간부터 마음속에 평화와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 꿈에서 위대하신 힘께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내 손에 빵 하나를 올려 주셨다.

그리고는 둘째가 내 안에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GA와 갬아넌 덕분에 새로운 생명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고통이라 여겼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 생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내게 믿음이 없었다면 이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 위대한 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GA 베이비가 태어날 수 있었던 GA와 갬아넌을 지키고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을 떠나 위대하신 힘 곁에서 우리의 성장을 지켜보고 계실 선행자분들 께도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둘째를 출산하고 정 선생 혼자서 모임을 열심히 다니던 시기가 찾아왔다.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했을 때에도 코로나보다 도박중독이 더 무서운 병이라며 몸 사리지 않고 모임을 다녔었는데,

아이를 출산하고 체력이 떨어지니 자꾸만 나는 미적거리며 움직이려 들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100일이 지나면 다녀야지 하던 것이, 본 모임만 가게 되었고, 돌 지나고 다녀야지 하던것이 코로나를 핑계를 대며 자꾸 뒤로 몸을 뺐다.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그 하루하루가 너무도 행복했다.

본 모임만 다녔지만 내게는 그 어느 순간보다 평온했고 행복했다.

아이를 돌보는 그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생각되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진주 모임을 지키고 계시던 선행자 분과의 커피 한 잔의 시간.

내게 한 말씀을 하셨다.

" 김 여사님 요즘 너무 나태해진 것 아닙니까. 초심을 잃으시면 안됩니다."

그날 온 에너지를 다해서 내게 하신 말씀이라고 나는 여기고 있다.

병상에 누워서는 잘하고 있다는 칭찬도 잊지 않으셨다. " 맞습니다. 김 여사님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계속하시면 됩니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모르면 무엇이든 쪼르르 달려가서 물어볼 수 있고, 충고도 칭찬도 아끼지 않은 선행자 선생님들과 여사님들을 곁에 두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내가 현실에 안주하여 스스로 최선이냐고 묻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 들 때,

나를 지켜보던 선행자분들께서 내게 충고를 해주신다.

"김 여사님, 정 선생 잘 봐야 해요. 도박중독잡니다." 그러면 또 나는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낸다.

그리고 나도 살고 남도 살고자 나를 일으키고 모임을 둘러본다.

오해와 질책을 받을지 언정 다른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나도 받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 본다.

GA라는 환경이, 진주 모임이라는 환경이 나를 만들고 있다. 물론 내가 그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모임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오늘 또 그 한 발을 내딛어 본다.

아직 날씨는 춥지만, GA에서 주는 온기는 따스하다.

잘 왔다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했다고, 늘 따스하게 반겨주시는 여사님들 선생님들이 계셔서 참 감사하다.

오늘 나는 초등학교 예비소집장을 들어 서던 아들의 입장이 되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신발끈을 묶어본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변명'을, 실천한 사람은 '증명'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일상이라는 꽃밭에 심게 된다고 한다.

정선생님, 그리고 우리 예쁜 남매들.

잘 해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해 봅시다.

우리 GA식구들과 함께 '증명'이라는 꽃을 피우며 살아가 봅시다.

위대하신 힘이여.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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